한국의 차세대 이차전지 기술 패권 확보를 위해 출범한 K-BIC(Battery Innovation Consortium, 시장선도형 차세대 이차전지 혁신 전략연구단)의 김명환 단장을 만났습니다. 그는 세계 최초로 전기차용 리튬이온 이차전지를 개발한 개척자이자 우리나라를 이차전지 산업의 글로벌 리더 자리에 올려놓은 핵심인물입니다. 중국산 이차전지의 대공습으로 세계시장에 거대한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는 지금, 그는 다시 한번 중책을 맡아 대한민국 이차전지 산업의 기술혁신을 진두지휘하고 있습니다.
Chapter 01
한국 이차전지 산업의 개척자

김명환 단장은 서울대 공업화학과와 KAIST 화학공학 석사를 거쳐 선구적인 고분자 연구로 유명한 미 애크런(Akron) 대학에서 고분자공학 박사 과정을 밟았습니다. 1996년 LG화학 초대 배터리 개발팀장을 맡아 리튬이온 이차전지 양산을 이끈 그는 2005년, 누구도 예상 못한 과감한 발상으로 세계 이차전지 시장의 판도를 뒤흔들게 됩니다. 리튬이온 이차전지의 원조 개발국 일본이 주도권을 쥐고 있던 소형 이차전지 대신 전기차용 이차전지로 승부를 걸겠다는 전략이었습니다.

후발주자 한국이 세계 최초로 전기차용 이차전지를 개발하게 된 과정을 좀 더 소개해 주세요.
LG화학이 리튬이온 이차전지 개발을 시작한 것은 해외 출장길에 리튬이온 이차전지의 성장 가능성을 보고 샘플을 챙겨온 고 구본무 회장님의 선견지명 덕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프린트용 토너와 반도체 소재를 개발하던 저를 중심으로 30여 명의 배터리 개발팀이 꾸려지게 되었습니다. 이미 소형전지를 양산하고 있던 일본을 빠르게 따라잡기 위해 연구개발이 공격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 결과, 불과 1년 만에 파일럿 라인이 구축되었고, 다시 1년 뒤에는 양산 라인이 가동될 만큼 빠른 속도로 개발이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높은 난이도 때문에 수년간 품질문제와 적자가 거듭됐습니다. 그렇게 연구만 하다가 사업부장까지 맡아 마음고생을 하던 중에 자동차에 배터리를 장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앞서 1997년 도요타가 하이브리드 차량을 출시해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데도 일본 회사들은 이차전지의 미래를 외면한 것이지요. 저는 기술적 발전이나 지구환경 보호 차원에서도 완전한 전기차 개발이 가능하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2005년부터 자동차용전지 연구소를 맡아 연구개발에 매진한 끝에 2010년 상용 전기차 역사의 신기원이 된 미국 GM 볼트(Volt)에 자동차용 배터리를 탑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회사에서도 그룹 차원의 핵심 사업이 될 것임을 예견하고 폴란드, 미국, 중국까지 배터리 생산공장을 대대적으로 확장하기 시작했지요.
덕분에 오늘날 한국이 이차전지 강국으로 우뚝 설 수 있는 중요한 발판을 마련하셨습니다.
그간의 소회에 대해서도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화학연 연구자들도 충분히 공감하시겠지만 업계에서는 ‘이차전지에 몸담으면 평생을 발 뻗고 자기 힘들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만큼 개발도, 양산도 어려운 것이 이차전지 기술입니다. 일본의 연구자나 기업인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도 위장 장애를 달고 산다며 고충을 토로하곤 했습니다. 그런 힘든 길을 걸으며, 누구도 가보지 못한 설원을 밟아 나가는 과정은 분명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하지만 긴 터널 끝에서, 마침내 우리나라가 리튬이온 이차전지 강국으로 자리 잡은 모습을 보니 감개무량할 따름입니다. 돌이켜보면, 회사 내에서도 배터리 사업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보는 시각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믿고 지지해 주신 고(故) 구본무 회장님께 감사한 마음을 늘 간직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결실을 직접 보지 못한 채 2018년 작고하신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Chapter 02
2025, 다시 격전의 현장으로

김 단장은 오늘날 국가주력산업이 된 이차전지 기술 개발의 공로로 장영실상 대통령상, 과학훈장 웅비장, 포스코 청암기술상 등 많은 상을 수상했습니다. 약 30년간을 이차전지 연구개발에 주력한 그는 LG에너지솔루션 사장(CPO)에 이어 고문으로 일하던 중 올해 초 K-BIC의 수장에 오르게 됩니다.

민간 대기업에서 최고 책임자까지 역임한 단장님이 정부출연연 중심의 조직을 맡은 게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많습니다. 부임하시기까지 고민은 없으셨는지요?
그간의 경험을 살려 민·관 협력으로 우리 이차전지 산업의 모든 역량을 한 데 모으는 데 힘써달라는 이영국 화학연 원장님의 요청에 다시 어려운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생리를 잘 모르는 출연연과 정부 조직에 함께한다는 것, 그리고 이제야 간신히 찾아온 시간적 여유를 포기해야 한다는 점에서 조금은 망설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왠지 도전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포스코 청암기술상을 받으며 수상소감에서도 토로했듯이 오랜 시간 제가 이차전지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어디 하나 속 시원히 물어볼 곳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도 가보지 못한 길이었으니 그게 당연했지요. 그래서 내가 나중에 은퇴하면 후배들을 돕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는데 이 원장님의 말씀을 들으며 “지금이 그때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현재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이차전지 산업의 화두는 단연 중국 배터리와 전기차 대공세입니다.
단장님은 비교적 이른 시기인 2010년대부터 중국의 급성장을 예견해오셨는데요.
향후 글로벌 이차전지 산업 지형에 대한 단장님의 분석과 전망이 궁금합니다.
우리나라의 주력 산업인 리튬이온 이차전지는 그동안 한국 배터리 3사가 구축해 온 대규모 특허 포트폴리오 덕분에 쉽게 따라잡을 수 없는 영역입니다. 하지만 리튬인산철(LFP) 배터리의 경우, 중국 기업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특허를 보유하고 있어 곧 상당한 경쟁력을 갖출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실제로 중국의 이차전지 역량은 다른 경쟁국들을 초긴장 상태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은 여전히 세계 최대 내수시장인 자국 중심의 안방 호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그간 꾸준히 확대해 온 해외 현지 생산 공장을 기반으로 세계시장에서의 주도권을 지키고 있지요. 향후 우리나라가 더욱 주력해야 할 부분도 이런 세계화 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 높은 기술장벽에 더해 디지털 전환·스마트팩토리를 기반으로 해외 어디에서나 안정적인 수율로 고품질 이차전지를 생산할 수 있는 역량을 지속적으로 늘려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고에너지밀도·초경량·고안정성·소재자립화·초저가·고속충방전·저탄소 등 이른바 ‘7-Tools’로 불리는 초격차 기술 확보에 힘쓰고 있는 K-BIC 역할과 민간기업들의 협력이 더욱 중요해질 것은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