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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를 무시하는 화학물질 위해성 평가

작성자  조회수4,019 등록일2024-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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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 칼럼

 

전문가를 무시하는

화학물질 위해성 평가

 

글 |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용량(dose)이 독(poison)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독성학의 아버지 파라켈수스가 남긴 중요한 교훈이다.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세상에 ‘약’(藥)과 ‘독’(毒)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만병통치의 ‘영약’(靈藥)과 치명적인 ‘독약’(毒藥)의 차이가 사실은 종이 한 장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실 대부분의 화학물질은 인체에 ‘위해’(危害)하다. 산업적으로 합성한 ‘인공물’만 그런 것이 아니다. 자연에 존재하는 ‘천연물’도 인체 위해성을 걱정해야 한다. 안심하고 무작정 먹거나, 호흡으로 흡입하거나, 피부에 접촉해도 되는 화학물질은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 물에 녹는 특성을 가진 화학물질은 더욱 그렇다. 심지어 우리의 생존에 꼭 필요한 물과 소금도 위험할 수 있고, 3대 영양소인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탄수화물 중독과 너무 짠 음식을 경계해야 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화학물질의 위해성 관리

 

소비자가 그런 화학물질의 위해성에 신경을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누구나 화학물질의 위해성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부가 소비자에게 위해할 수 있는 화학물질을 엄격하게 관리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식품과 의약품에 들어있는 화학물질의 위해성은 식품의약품안전처가 관리하고, 공산품의 화학물질은 산업부 산하의 국가기술표준원이 관리한다. 환경과 관련된 화학물질의 위해성 관리는 환경부가 담당한다.

 

화학물질의 위해성 평가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학물질 관리법’ 제7조(화학물질관리위원회)에는 화학물질의 관리에 관한 사항을 결정하는 위원회의 위원은 반드시 ‘화학·환경·보건 등 관련 분야의 학식과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와 화학물질 관련 업계의 대표 및 관련 분야의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에게 맡기도록 명문화해놓았다.

 

정부는 화학물질을 3가지로 구분해서 관리한다. 위해성이 충분히 낮은 화학물질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위해성이 너무 커서 일반 소비자가 사용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화학물질은 사용을 원천적으로 ‘금지’한다. 일반 소비자의 사용이 금지된 화학물질은 식품·공산품·환경에서 검출되지 않아야만 한다. 정부가 ‘허용기준’을 정해서 제품의 생산과 유통을 관리하는 화학물질도 있다. 식품이나 공산품의 보존제(‘방부제’가 아님)나 첨가제의 경우가 그렇다. 제품의 생산과 유통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지는 유해성분의 경우에도 허용기준을 정해서 관리하기도 한다.

 

허용기준에 따라서 생산·유통되는 제품이라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정부가 정해놓은 허용기준은 아무렇게나 사용해도 된다는 뜻의 ‘안전기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허용기준을 만족하는 제품이라도 사용량과 사용 방법에 대한 소비자의 건강한 상식이 꼭 필요하다. 사용 과정에서 소비자의 잘못으로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코 쉽지 않은 인체 위해성 평가

 

화학물질의 ‘위해성’(危害性)을 확인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인체 실험이다. 그러나 새로 개발하는 의약품의 부작용을 확인하기 위한 경우가 아니라면 윤리적 이유로 화학물질의 인체 실험은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다. 화학물질의 위해성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결국 화학물질의 위해성은 통계적일 수밖에 없다. 유해물질이라고 모두 포기할 이유가 없는 셈이다.

 

화학물질의 위해성은 3가지 요인에 의해서 결정된다. 첫째는 화학물질 자체의 ‘유해성’(hazard)이다. 화학물질은 몸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생리현상의 정상적인 작동에 영향을 미쳐서 생리작용을 증진하기도 하고, 억제하기도 한다. 그런 효과가 건강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해가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서 술의 유효성분인 에탄올(에틸알코올)은 중추신경을 마비시키고, 인체에 암을 일으키기도 한다. 국제암연구소(IARC)는 술과 에탄올을 모두 인체 발암성이 확인된 1군으로 분류한다. 담배·(중국식)젓갈·가공육도 인체 발암성이 확인된 1군 발암물질이다.

 

화학물질의 위해성에 영향을 미치는 둘째 요인은 ‘노출량’이다. 아무리 유해성이 큰 물질이라도 노출량이 충분히 적으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반대로 유해성이 아무리 낮더라도 노출량이 지나치게 많으면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설탕이나 소금은 우리의 생존에 꼭 필요한 물질이지만, 장기간에 걸쳐 너무 많은 양을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섭취하면 건강에 문제가 된다. 술도 마찬가지다. 적당한 음주는 기분을 좋게 해주지만, 지나치게 마시면 판단력이 흐려지고, 말이 어눌해지고, 행동이 굼뜨게 된다.

 

화학물질의 위해성을 결정하는 셋째 요인은 ‘노출 방법’이다. 우리의 피부는 화학물질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차단 기능을 발휘한다. 그러나 면역 기능을 갖추지 못한 호흡기와 눈의 경우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소량의 화학물질에 의해서 심각한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다.

 

2011년에 확인된 가습기 살균제의 경우가 그랬다. 가습기 살균제라는 제품 자체에는 살균력을 가진 살생물질(biocide)의 농도가 0.1% 수준으로 들어있고, 세척에 필요한 계면활성제는 전혀 들어있지 않은 ‘맹물’에 가까운 엉터리 제품이었다. 그러나 많은 소비자에게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발생한 것은 엉터리 제품을 가습기 살균제에 넣어서 밀폐된 실내에 분무하라는 제조사의 ‘살인적인 사용방법’ 때문이었다.

 

 

 

전문성을 포기해버린 정부

 

정부가 화학물질의 위해성 관리에 대한 책무를 왜곡하거나 포기해버리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 과학적 근거를 찾기 어려운 소비자의 반발에 법률로 정해진 관리 기능을 통째로 포기해버리는 경우도 생겼다.

 

수돗물 불소화 사업은 충치(치아 우식증)의 예방을 위해 수돗물에 0.8ppm 수준의 불소(플루오린)을 첨가하는 사업이다. 미국은 물론 세계보건기구(WHO)에서도 예방 효과와 안전성을 충분히 확인한 사업이다. 지금은 우유에 불소를 첨가하는 사업도 진행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수돗물 불소화 사업은 1981년 진주와 1982년 청주에서의 시범사업으로 시작되었다. WHO의 자문을 받았고, 1985년부터 3년 동안 진주와 청주의 시범사업에 대한 충치 예방효과와 안전성에 대한 검증 작업도 완료했다. 과천(1994년)과 포항(1995년)에서도 수돗물 불소화 사업이 시작되었다.

 

 

2000년에 ‘구강보건법’이 제정되면서 전국적으로 확대하게 되었다. 2001년에는 전국 31개 지역 36개 정수장에서 443만 명을 대상으로 불소를 첨가한 수돗물이 공급되었다. 수돗물 불소화 사업의 예방효과는 충분히 확인되었다. 2018년에 실시한 합천군 구강보건실태조사에 따르면 수돗물 불소화를 실시하기 전인 2000년보다 충치 예방률이 40.6%(8세)에서 76.1%(12세)까지 큰 폭으로 증가했다.

 

그런 수돗물 불소화 사업이 1998년 ‘수돗물 불소화 사업이 원자탄 개발 계획의 일환’이라는 영문학자의 선정적인 주장과 뒤이어 시작된 ‘화학물질 혐오증’(케모포비아)의 확산, 그리고 2014년 화평법·화관법의 제정으로 동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결국 소비자의 불안 심리를 극복하지 못한 정부는 2018년 12월 영월을 마지막으로 수돗물 불소화 사업을 중단해버렸다. 정부는 아직도 수돗물 불소화 사업을 재개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소비자 관점’에서의 위해성 평가가 필요하다는 황당한 주장도 있다. 자연에 존재하는 폴리페놀을 이용한 염색 샴푸의 경우가 그랬다. 결국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염색 샴푸에 첨가제로 사용하는 THB(1,2,4-트라이하이드록시벤젠)의 위해성 평가를 전문성을 기대할 수 없는 소비자단체에게 맡겨버렸다. 전문가들이 신기술을 개발한 기업에게 편향된 평가를 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화학물질의 위해성에 대한 소비자의 불안은 괜한 것이 아니다. 소비자가 위해성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이 없다는 것이 불안을 부추기는 요인이 되고 있다. 화학물질의 위해성에 대한 정부의 전문적이고 과학적인 관리가 중요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과학적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엉터리 괴담에 흔들리는 소비자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는 정부가 소비자의 신뢰가 보장된 전문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정부가 오히려 엉터리 괴담을 증폭시키는 상황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