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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화학자

작성자하이브파트너스  조회수1,071 등록일2022-07-21
이야기화학사+02.jpg [60.5 KB]

이야기 화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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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화학자

글 | 이덕환(서강대 명예교수,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과)

글 | 김근배(전북대 교수, 과학학과)

 

 

‘먹거리 X파일’이라는 자극적인 종편의 소비자 고발 프로그램이 선정한 ‘착한 식당’ 때문에 온 세상이 시끌벅적했던 적이 있었다. 광우병 소동으로 떠들썩했던 2008년의 일이었다. 당시 종편이 제시한 선정 기준은 놀라울 정도로 단순했다. ‘화학조미료’의 사용 여부가 유일한 기준이었다. 절차도 허술했다. 식당을 몰래 찾아간 선무당 수준의 전문가들이 음식을 맛보는 것이 전부였다. 책임 있는 언론의 자세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옐로 저널리즘의 파장은 엄청났다. 지자체는 물론이고 교육부와 공군까지 속절없이 휘둘리고 말았다.

 

 

한국 최초의 화학자는 누구일까?

이는 한국에서 화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는 상식에 해당하는 질문이다. 화학의 역사가 어떻게 진전되어 왔는지를 아는 것은 화학 전공자들에게는 기본적인 소양이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처음으로 화학을 공부하고 관련 직종에서 활동한 한국인이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극히 초보적인 지식이다. 이것은 마치 화학에서 열역학 제1 법칙을 아느냐고 묻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첫 한국인 화학자를 알지 못할 것이다. 한국의 화학 역사를 전공 과정에서 제대로 배운 사람들은 없다고 생각한다. 오로지 과학 전공지식의 습득에만 치중할 뿐 그 역사, 철학, 사회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우리 과학계의 풍조 때문이다. 게다가 앞선 과학자들에 대한 관심의 전반적인 결여는 과학의 역사와 그 속에서 활약한 인물에 대해 둔감하게 만든다.

 

화학자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도 논쟁적일 수 있다. 근대화학을 처음 학습하고 관련 분야에서 활동한 근대적 의미의 인물로는 이희민이 있다. 그는 1881년 중국으로 파견된 영선사행의 군계학조단 일원으로 참여했다. 귀국 후에는 무기기술 업무에 종사한 근대적 첫 화학기술자라고 할 만한 인물이다, 한편, 화학에 대한 고등교육을 받고 전문분야에서 활동한 현대적 의미의 인물로는 이용규가 있다. 1916년 미국 대학에서 화학을 처음 공부하고 돌아와서는 전문분야에서 활약한 최초의 현대적 화학자다.

 

이용규(개명 이봉구, 1881)가 낯선 이유는 먼저 그가 아주 오래 전에 미국에서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그는 함남 흥남 태생으로 1903년 미국 하와이로 건너갔다.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로 이민을 갔는데, 그의 의도는 신학문을 배우고 싶은 열망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말하자면, 미국 하와이 이민을 해외유학의 지름길로 여겼던 것이다. 이러한 기대와 달리 그는 하와이에서 고된 일만 할 뿐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해 결국 캘리포니아를 거쳐 1906년 콜로라도 덴버로 옮겼다. 그의 나이 어느덧 25세였다. 

 

당시 콜로라도 주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많이 몰리는 지역이었다. 독립운동가 박용만의 주도로 일하면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 헤이스팅스대학과 교섭을 통해 소년병학교를 개설해 오전에는 일을 하고 오후에는 학과 공부와 군사훈련을 할 수 있었다. 교과목은 상급학교 진학에 필요한 영어, 수학. 이과, 역사, 지리 등을 포괄했다. 아울러 이곳은 철도공사가 성황리에 추진되고 광산, 농장에서도 많은 일손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생활비와 학비를 벌기에 유리한 조건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기초교육이 부족해 초등학교부터 다녀야 했다. 와이머초등학교 2학년에 들어갔고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곧바로 4학년으로 진급했다. 이듬해에는 덴버대학(University of Denver) 총장을 찾아가 입학 허가를 요청하기도 했다. 그는 대학에 진학하려면 8년의 기간이 더 필요했으나 자신의 많은 나이를 생각했다. 헨리 부흐텔(Henry A. Buchtel) 총장은 그의 의지를 높이 사 일단 시험을 치르게 했고, 그 결과 중등과정인 대학 예과에 진학하도록 했다. 이곳에서 4년 동안 영어, 라틴어, 대수, 생리학, 물리학, 화학 등을 배웠다.

 

대학 예과를 마친 그는 1912년 네브라스카대학(University of Nebraska)에 진학했다. 이 대학은 알려진 주립대학으로 학비도 싸서 인근 지역의 한국 학생들이 많이 다니던 곳이었다. 그는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분야로 선택했다. 우선, 미국으로 건너오기 전에 그는 고향에서 전통의학을 공부하며 약제를 짓곤 했는데, 그것의 원리나 이치가 경험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화학에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화학은 의학뿐만 아니라 공업 등의 실업 분야에도 널리 이용되고 있어 물질을 발달시켜 생존하려면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분야라는 것이다. 

 

그는 일하면서 대학을 다녔다. 학비는 물론 생활비도 스스로 충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으로 학과 수업시간을 제외한 아침과 저녁에는 갖가지 일들을 해야 할 만큼 힘들게 보냈다. 한국의 다른 학생들과 함께 여러 활동에도 참여했다. 이 때문에 그는 주로 주말의 휴식시간을 이용해 밀린 공부를 보충해야만 했다. 힘든 생활과 경제활동의 유혹에도 공부에 대한 열정은 잃지 않고 꾸준히 이어나갔다. 졸업 직전에는 우등생으로 미국정부의 석유분석소에 조수로 참여했고 네브라스카알칼리실업회사에서 화학 분석사로 일하기도 했다.

 

1916년 네브라스카대학 화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화학분야 중에서도 분석학을 세부전공으로 삼았으며 화학실험 조수로 교육연구에 참여했다. 당시 석사과정은 1년 과정으로, 미국화학회 네 번째 여성회원인 메리 포슬러(Mary L. Fossler) 교수의 지도 아래 1917년 화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제출한 석사논문은 “콩 연구”(A Study of the Soy Bean)였다. 그는 한국인 중에서 화학으로 학사학위는 물론 석사학위까지 받은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대학원을 졸업한 후에는 시카고공업연구소에서 엔지니어로 2년 동안 활동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용규가 낯설게 된 또 다른 이유는 그가 돌아오긴 했지만 평양에서 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그는 38세인 1919년 한국에서 전공을 살려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외국인 선교사들이 평양에 세운 숭실전문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 것이었다. 숭실전문은 이학과(Department of Science) 개설을 목표로 과학 관련 교과과정을 강화하고 교수진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때 그와 다른 한국인 과학자들이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보다 2년 뒤인 1918년에 노스웨스턴대학에서 화학으로 학사학위를 받은 김호연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그도 하와이를 거쳐 네브라스카대학을 다니다가 옮겨가 한국인 중에서 화학으로 두 번째 학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애초에 숭실전문은 일제 총독부의 설립 인가를 받는 것에 무관심했으나 주변의 평판과 졸업생들의 불만 등을 고려하여 운영방침을 바꾸었다. 두 중심적인 학과로는 문학과와 이학과를 염두에 두었다. 이학과는 설치 규정이 까다롭고 소요 경비가 많이 들지만 근대 학문의 강화와 과학 교원 양성을 위해 개설하기로 결정했다. 특히 응용화학이 중심이 된 이학과를 개설하고자 힘썼고 그가 주도적 인물의 일인이 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설비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숭실전문의 이학과 개설을 승인해주지 않았다. 결국 숭실전문에서 학교 운영방침을 바꾸어 이학과 대신에 농학과를 개설하기로 결정한 1927년에 그도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는 숭실전문을 퇴직한 후 고무공장, 석염공장을 운영하고 이후에는 전공과 관련 없이 과수원을 경영하는 등의 일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45년 해방을 맞아 고등교육이 몰려 있는 서울로 내려와 숙명여자전문학교 교수로 근무했다. 당시 서울은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던 데다가 학교도 좌우 갈등, 국대안 파동으로 수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1947년 그는 다시 북한으로 올라가 고향 근처에 세워지고 있던 흥남공업대학 화학공학부 교수로 임명받았다. 흥남공대는 북한 최초의 공과대학으로 월남 과학기술자들이 주축을 이룬 곳이었다. 그의 나이 66세로 말년을 향해 가고 있었다.

 

한국의 선구적 과학자들은 고등교육 이수는 물론 졸업 후 전공을 살릴 기회를 얻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나마 이용규는 화학분야의 첫 전공자였음에도 화학 관련 활동을 비교적 장기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마침 선교사들이 운영하고 있던 숭실전문에서 과학 교육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난 덕분이었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대학 설립이 활기를 띠면서 과학자를 위한 기회가 더 넓어지기도 했다. 그럴지라도 과학자로서 그가 남긴 성취는 그리 두드러지지 못하다. 그가 배출한 몇몇 후학이 과학을 이어나갔고, 그가 남긴 석사논문이 네브라스카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만큼 이루 말할 수 없이 척박한 과학 환경을 고군분투하며 홀로 헤쳐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