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1
역사와 신화의 땅, 울산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출처: 위키백과)
울산은 한국을 대표하는 산업 도시이기 전에 매혹적인 역사와 신화의 땅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울산바위’와 ‘처용설화’가 대표적입니다. 그중 울산의 역사문화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울주군의 국보 ‘반구대 암각화’라 할 수 있습니다. 울산이 선사시대부터 한반도의 대표적인 고래잡이 기지였음을 잘 알려주고 있는 것이 수염고래, 범고래, 돌고래 등 크고 작은 각종 고래의 모습과 사냥장면이 놀랍도록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는 반구대 암각화입니다. 반구대 암각화는 고대인의 흔적을 넘어 울산이라는 지역의 정체성과 문화적 뿌리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바로 현실의 경계를 넘으려는 끊임없는 ‘개척정신’이지요.
오늘날에도 울산은 계속해서 새로운 신화를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울산광역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입니다. 거대한 산업단지를 배경으로 전국 두 배 수준 1인당 GRDP(지역내총생산)를 자랑하며 우리나라의 1인당 GDP 4만 불 시대를 앞장서 견인하고 있지요. 하지만 최근의 분위기는 사뭇 다릅니다. 자동차, 조선과 함께 트로이카 체제를 이루며 도시의 번영을 견인해 온 석유화학산업의 미래가 안개 속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1960년 우리나라는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며 세계사에서도 유례가 없을 만큼 극적인 고도성장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특히 바람과 갈대뿐인 울산만 일대를 대규모 석유화학단지로 탈바꿈시킨다는 계획은 가난했던 한 나라의 운명을 뒤바꾸는 역사의 분수령이 되었지요. 울산에서 용틀임을 시작한 대한민국의 석유화학산업은 오늘날 미국, 중국,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세계 석유화학 산업의 빅4로 거론될 만큼 성장을 거듭해왔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제와 산업을 앞장서 이끌어 온 석유화학산업은 최근 깊은 불황의 늪에 빠지고 있습니다. 주력제품인 나프타, 에틸렌, 프로필렌 등의 범용소재들이 중국과 중동의 대규모 투자와 저가 물량공세로 인한 글로벌 공급 과잉 상태 속에 수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내 전문가 대다수가 입을 모아 강조하는 돌파구는 단 하나입니다. 앞서 변신에 성공한 미국, 유럽, 일본처럼 낮은 부가가치의 범용소재 대신 고부가 스페셜티 제품 중심의 정밀화학 산업으로 체질 개선을 해야 한다는 것인데요.
Chapter 02
첨단 정밀화학 도시로 힘찬 점프
최근 화학연이 발간한 도서 <화학연이 실현하는 울산의 꿈>도 이 같은 울산 고유의 드라마틱한 도전정신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책은 울산시와 화학연의 기술협력사업을 통해 탄생한 다양한 기술혁신 성과를 그 배경부터 결과까지 약 120쪽에 걸쳐 차근차근 풀어나가고 있는데요.

한국화학연구원 발간 도서 <화학연이 실현하는 울산의 꿈>
화학연은 49년 전 연구원이 출범한 이래 줄기찬 연구개발을 통해 석유화학을 포함한 국내 화학산업 전반의 경쟁력 향상에 기여해왔습니다. 또한 대한민국 석유화학산업의 중추이자 미래 정밀화학산업의 전진기지인 울산에서 오랜 시간 중소·중견기업의 역량 강화에 주력해 왔습니다.
울산시와 2006년 ‘울산산업진흥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한 이래 대표적 협력사업인 ‘울산시-화학연 기술협력사업’을 통해 20년간 총 87개 과제를 대상으로 246억원의 연구비를 지원했습니다. 또한 2012년과 2016년에는 각각 정밀화학과 바이오화학을 담당하는 연구센터를 울산에 개소하여 화학산업의 신산업 전환을 선도해가고 있습니다.
2019년에 이어 두 번째로 발간된 이 기술협력사업 사례집에는 그간의 빛나는 성취를 뒤로 한 채 새로운 변신에 나선 9곳의 기업, 그리고 그들을 한층 더 높은 수준의 첨단 정밀화학 기업으로 성장시키고자 하는 화학연의 땀과 눈물이 다채로운 스토리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Chapter 03
석유화학산업을 부탁해


(좌) (주)조비 홍기창 책임연구원, (우) 한국화학연구원 김효정 선임연구원
가장 처음 등장하는 대표 사례가 화학연이 개발한 고강도·친환경 생분해 고분자를 피복비료 소재에 적용하고 있는 (주)조비입니다. 비료회사 조비의 제품 중 가장 판매량이 많은 완효성(緩?性) 비료는 비료의 성분이 농작물 생육 단계에 맞게 적절히 공급되도록 표면을 특수한 물질로 코팅하는 비료입니다. 한 번만 비료를 시비해도 3~4개월 간 효과가 지속되기 때문에 노동력이 크게 절감되지요. 하지만 비료가 식물에 흡수된 뒤 남는 폐플라스틱, 특히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미세 플라스틱이 먹이사슬을 통해 인간의 건강을 위협하기 때문에 외부에 코팅하는 고분자를 대체할 생분해성 피복물질의 개발이 시급한 상황이었습니다.
화학연은 생분해 고분자 분야에서 계속해서 세계적으로도 주목받는 연구 성과들을 창출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땅과 물의 미세플라스틱 오염을 유발하는 피복비료의 소재로 활용하는 것은 전혀 경험이 없던 분야였습니다. 이에 따라 기술과 시장동향 조사부터 제품의 용도와 특성에 맞는 연구 기획까지 많은 노력 끝에 기존 합성고분자 피복소재보다 8배 낮은 수분투과도와 생분해율 100%를 자랑하는 친환경 생분해성 비료 피복소재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케이에스케미칼(주) 불소 변성 실리콘 소포제 Rheoflow AF-660
‘독일·일본 독점 깨트린 울산 태생 혁신 첨가제’라는 제목의 다음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최근 미국과의 관세협상에서 우리나라의 강력한 협상 지렛대가 된 조선업은 선박용 도료가 매우 중요한 소재입니다. 선박용 도료는 한 번 도장을 마치면 바닷물, 자외선, 기름, 화학물질 등 갖은 악조건 속에서도 최소 10년은 기능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선체의 어느 부위를 막론하고 ‘매우 두텁게’ 도장되어야 합니다. 두껍게 바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도료의 점성이 높아야 합니다. 하지만 높은 점성은 그만큼 기포가 잘 안 빠지는 문제를 유발하는데요. 이를 방지하기 위해 배합하는 첨가제가 ‘소포제’로 최종제품인 도료의 전체 배합에서 매우 적은 비중을 차지하지만 도장 품질과 완성도에 큰 영향을 미치는 핵심소재가 되고 있지요. 우리나라는 이 소포제를 거의 전량 해외에서 수입해 쓰고 있었는데요.


(좌) 케이에스케미칼(주) 유은정 대표, (우) 한국화학연구원 유영창 책임연구원
국내 주요 고객사로부터 선박 도료용 소포제의 국산화를 의뢰받은 케이에스케미칼(주)는 자체적인 연구개발에 인력과 자금 모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울산의 기업이기에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있었지요. 바로 국내 최고의 정밀화학 전문가들이 중소기업의 기술역량 강화를 지원하는 ‘화학연’이란 든든한 뒷배가 있었던 것이지요. 고객사가 요구하는 선박 도료용 고기능성 소포제 개발에는 까다로운 핵심기술이 필요했습니다. 해수, 자외선, 용제 등에 대한 저항성이 뛰어나 극한 해양 환경에서도 내구성과 안정성이 보장되는 ‘불소 실리콘 고기능성 탄성 소재’의 합성이었는데요. 케이에스케미칼과 화학연의 2년여 협력연구 끝에 탄생한 선박 도료용 불소 변성 실리콘 소포제는 영하의 조건에서도 기포나 침전물이 발생하지 않는 완벽한 성능을 자랑하며 현재 오대양을 누비는 한국산 선박의 높은 완성도와 안전한 항행에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지난 8월 발간된 따끈따끈한 신간 <화학연이 실현하는 울산의 꿈>에는 이외에도 화학연과 중소기업의 협업을 통해 탄생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궁금하신 독자들은 연구원 홈페이지를 통해 누구나 무료로 볼 수 있는데요.
https://www.krict.re.kr/prog/publication/kor/sub06_06_02/A100/researchBook.do
거센 파도를 가르며 힘차게 솟구치는 울산만의 고래들을 형상화한 책 표지처럼, 정밀화학 강국의 새로운 신화를 향해 다시 한 번 재도약을 시작한 울산과 화학연의 대장정을 한층 생생히 느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