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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ict Special

화학이 지키는 식량주권의 씨앗

작성자하이브파트너스  조회수580 등록일2022-07-21
나르샤2+01.png [676.9 KB]

KRICT 나르샤 II

* 나르샤는 ‘날아오르다’라는 뜻의 순우리말입니다.

 

 

 

 

화학이 지키는 식량주권의 씨앗


 

한국화학연구원에는 ‘화학’ 하면 연상되는 전형적인 분위기와 사뭇 다른 특별한 공간이 있습니다. 각양각색의 연둣빛 식물들이 자라고 있는 유리온실들입니다. 신물질 제초제와 살균제, 식물병 저항성 검정기술 등 한국 농업의 혁신 기술들을 연구하는 친환경신물질연구센터의 일터입니다.

 

 

맬서스의 빗나간 예언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 고전경제학자 맬서스의 ‘인구론’은 초판이 발행된 18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절대적인 신봉의 대상이 됐습니다. 과잉인구와 식량부족으로 많은 이들이 빈곤과 범죄에 빠지리란 비관론이 세계를 지배했지요. 덕분에 영국 등에서는 근대적인 인구조사가 처음 실시되고빈민구제법이 개정되는 등 당대의 사회·경제 체제를 새롭게 돌아보는 각성의 계기가 되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그의 예측은 간과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눈부시도록 빠른 과학기술의 진보였습니다.


1908년 독일의 화학자 프린츠 하버는 공기 중의 질소와 수소로 암모니아를 생성하는 질소고정법을 개발했습니다. 2년 후 카를 보슈 박사는 하버의 암모니아 합성 실험을 산업화하는 데 성공하며 질소비료의 시대를 열지요. 1938년에는 살충제가, 1943년에는 살균제가 그리고 1944년에는 제초제가 개발되기 시작해 병·해충 방제로 인해 수확량이 증가되었고, 고된 노동에 허덕이던 농민들의 수고를 덜 수 있게 됩니다. 여기에 품종개량, 기계영농, 관개시설 등의 기술들이 더해지며 20세기 중반부터 농업의 패러다임은 크게 바뀌어갔습니다. 맬서스의 암울한 예언을 기우로 만든 녹색혁명이 시작된 것입니다.


하지만 비약적인 농업 생산성 향상의 주역이 된 화학비료와 합성농약은 과다 사용으로 인한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하천과 토양이 오염되고 농업인과 소비자의 건강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가능성이 하나둘씩 알려지기 시작했지요. 이에 따라 더욱 안전하고 친환경적인 신물질 개발이 화학계의 중요한 화두로 부상하게 됩니다.

 

 

전화위복 된 물질특허 압박

 

의약과 함께 정밀화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제초제, 살충제, 살균제 등의 작물보호제는 한국화학연구원이 1976년 설립 때부터 많은 공을 들여 연구해온 분야였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녹색혁명의 기운이 한창이던 시기입니다. 단위면적당 수확량이 30%나 높은 통일벼가 보급되면서 해방 이후처음으로 쌀을 자급하게 되었고, 새마을운동이 상징하는 농촌 근대화의 깃발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나부끼고 있었지요.

화학연의 초창기 임무 중 하나도 국내 농민에게 환경에 안전하고 효과가 좋은 농약을 싼 값에 공급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당시는 물질특허와 관계 없이 선진국의 기술과 제품을 복제하는 것이 가능하던 시기입니다. 화학연 연구자들은 신젠타, 바이엘, 바스프 등 세계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기업들의 제품을 분석해 동일한 성능의 농약을 경제적으로 생산하는 기술을 국내 산업계에 공급했습니다. 선진국들은 차츰 한국의 빠른 국산화 기술 수준에 위협을 느꼈고 제품특허만 인정하고 있던 우리 정부에 물질특허의 도입을 요구하게 됩니다.

많은 진통 끝에 1987년 본격 시행된 물질특허 제도는 오히려 화학연의 신물질 개발을 촉진하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습니다. 신물질을 만든다는 것은 막대한 시설 투자와 장기간의 연구개발이 필요한 영역입니다. 하지만 당시 국내의 사정은 물질특허가 무엇인지 개념조차 생소할 만큼 신물질 창출에 대한 경험은 물론 실험실과 장비도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초대형 국가연구개발사업인 G-7 프로젝트에 농·의약을 포함시켜 화학연의 연구기반을 대대적으로 확충하게 됩니다.

화학연의 신물질 연구개발은 착수 후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모방에서 혁신 단계로 나아갔습니다. 세계시장에 내놓을 만한 신농약 개발을 목표로 삼은 화학연 연구진은 1995년 우리나라 최초로 농약 부문 세계적 농약 기업 중 하나인 제네카에 유럽형 밀 제초제 특허기술을 이전한 것을 신호탄으로 제초제와 살충제 등 작물보호제 전반에 걸쳐 세계적인 신물질들을 끊임없이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화학연의 신물질 연구개발에서 특히 더 주목할 점은 산·학·연 협력의 거점 역할입니다. 신물질은 발굴에서 원제 등록까지 최소 10여 년의 시간과 많은 비용이 소요됩니다. 따라서 기획단계에서 시장 트렌드와 기업의 필요 등에 대한 폭넓은 안목을 바탕으로 명확한 목표를 수립해야 합니다. 이에 화학연 연구진들은 본연의 연구개발뿐만 아니라 기술이전 기업과의 지속적인 협력에 특히 많은 심혈을 기울였는데요. 이런 전통은 신물질의 성공적인 사업화를 넘어 국내 기업이 세계 화학산업의 본진이라 할 미국, 일본 및 호주의 시장까지 공략하게 만드는 중요한 원동력이 됐습니다. 

 

 

 

12조 세계시장의 다크호스로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유조선 물막이 공사로 유명한 서산간척지. 1996년 현대서산농장은 10여 년 간의 소금기 제거를 마치고 마침내 대규모 벼농사를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먼저 자리를 잡은 광활한 갈대 군락 제거가 큰 고민이던 차에 화학연에 갈대 제거용 제초제 개발을 의뢰합니다. 제초제는 크게, 살포된 지역의 모든 식물을 제거하는 ‘비선택성 제초제’와 작물 재배에 해가 되는 특정 식물만 제거하는 ‘선택성 제초제’로 나뉩니다. 원점에서부터 다각도로 검토에 들어간 화학연은 당장의 잡초 제거를 넘어 장기적인 영농 효과를 고려할 때 비선택성 제초제보다 선택성 제초제가 더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렸고 수요기업과의 긴 토의 끝에 연구 목표를 수정합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화학연이 개발한 제초제 메타미포프(Metamifop)는 잡초에 대한 제초활성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벼에 대한 안전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신물질입니다. 기존 약제 사용량의 3분의 1만으로도 제초 효과가 뛰어난 데다 독성 또한 소금보다 안전한 수준까지 낮추며 2009년 지식경제부 10대 신기술에 선정되었는데요. 2008년 LG화학의 자회사  팜한농을 통해 제품화된 메타미포프는 중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스리랑카, 인도, 태국, 베트남을 거쳐 일본 진출까지 성공하며 기염을 토합니다. 

메타미포프를 신호탄으로 세계시장 도전을 본격화한 화학연 신물질 연구진은 한층 더 높은 목표를 잡았습니다.  전 세계 비선택성 제초제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선진국 제품들에 도전장을 던진 것이지요. 당시 농업 현장에서는 기존에 시장을 분점하고 있던 제초제들의 지속적인 반복 사용에 따라 제초제에 내성이 생긴 저항성 잡초들의 발생이 점차 심각해지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해독제도 없어 ‘녹색악마’로 불린 그라목손처럼 제초제의 강한 독성도 큰 문제였지요.

 

이에 따라 오랜기간 함께 호흡을 맞춰온 팜한농과 공동연구에 들어간 화학연은 수천 종의 물질을 합성하고 테스트한 끝에 신물질 제초제 ‘테라도’를 완성합니다. 테라도의 성능은 비선택성 제초제 시장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던 선진국의 제품들을 압도하였습니다. 영국 등에서 진행된 150여 개 항목의 까다로운 안전성 시험에서 사람과 동물, 환경 모두에 안전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또한 약효의 속도는 기존 제품들보다 최대 10배가 빨랐지요. 특히 나날이 늘어나는 저항성 잡초들에 대한 탁월한 제초효과는 기존 제초제들이 사용량만 늘고 효과는 떨어졌던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낼 만한 것이었습니다. 

2014년 화학연의 ‘세계일등 화학기술’에 선정되며 일찌감치 큰 주목을 받은 테라도는 28개국 이상의 특허등록에 이어 2016년 국가 연구개발 우수성과 100선에 선정되었으며, 2020년 결국 제초제 시장 최고의 무대인 미국에 진출하는 쾌거를 거두게 됩니다. 업계에서는 테라도의 미국환경보호청(EPA) 신규 작물보호제 등록이 바늘구멍보다 통과하기 어렵다는 미국식품의약국(FDA)의 신규 의약품 승인에 비견될 정도의 기념비적인 성과라고 평가합니다. 그동안 국내 기업이 EPA 작물보호제 등록에 성공한 것은 몇 개월 앞서 잔디용 제초제 등록 사례 1건이 유일했습니다. 테라도는 한국에 2018년 출시되었으며 이후 미국, 호주,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및 스리랑카 등에 등록되어 수출이 진행중이며 캐나다 등록도 임박하였습니다. 특히 테라도는 미국 및 호주의 밀 재배지에 가장 문제가 되는 잡초인 저항성 라이그라스에 대한 방제력을 인정받아 기존 약제와의 합제 파트너로 우선 추천되어 시장이 크게 확대되고 있습니다.  

한편 놀랍게도 국내 상품명 ‘포아박사’, 해외에서는 ‘PoaCure’라는 이름으로 이미 150억 원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고 있던 이 잔디용 제초제 역시 화학연의 작품입니다. 바로 메티오졸린(Methiozolin)이지요. 메티오졸린은 원래 벼 제초제로 개발된 신물질입니다. 그런데 기술을 이전받은 ㈜목우연구소에서 벼 제초제보다 골프장 잔디 관리의 최대 골칫거리인 새포아풀 방제용으로 더 가치가 크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후 3년간에 걸쳐 화학연과 대량생산 공정을 공동개발하며 제품화에 성공한 메티오졸린은 2019년 미국 EPA에 원제 등록되었으며 이외에 호주 및 일본에 등록되어 수출이 확대중입니다.      
   
역사적인 미국 동반 진출에 성공한 메티오졸린과 테라도는 약 2조 원 규모의 미국 시장을 발판으로 현재 그 다섯 배가 넘는 전 세계 비선택성 및 잔디용 제초제 시장에 대한 공략 속도를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고군분투 한국 농업의 보루

농업 분야의 신물질 개발을 위해서는 비단 화학뿐만 아니라 생물연구도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친환경신물질연구센터에서는 합성 작물보호제뿐만 아니라 항생물질의 보고인 토양 방선균을 포함한 미생물과 식물 추출물과 같은 천연물 기반의 바이오 작물보호제를 발굴하기 위한 연구도 활발한데요. 

이와 함께 친환경신물질연구센터는 농림축산식품부가 지원하는 ‘채소병리검정지원사업단’의 중추기관 역할을 맡고 있기도 합니다. 채소병리검정지원사업단은 국내 종자회사들이 병에 강한 채소종자를 개발하는 데 꼭 필요한 병리검정을 지원하기 위해 지난 2009년 출범했습니다. 병리검정은 병원균에 대해 식물(종자)이 저항성을 갖고 있는지를 조사하는 것입니다. 어떤 식물이 특정 병원균에 대해 완전히 또는 자가 치유가 가능할 정도로 저항성을 가지고 있다면 내병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합니다.

주요 연구대상은 가지과, 박과, 배추과 등의 채소작물. 듣기엔 간단하지만 가지, 토마토, 고추, 파프리카, 오이, 수박, 참외, 멜론, 호박, 무, 배추, 양배추, 브로콜리 등 한국인의 밥상을 책임지는 채소들 대부분이 모두 이 3개 과(科)에 포함됩니다. 화학연 연구진은 그간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았던 국내 병리검정 체계를 바로 세우는 한편, 세계 각국의 치열한 종자전쟁 속에서 고군분투 중인 국내 중소 종자회사가 신품종 개발로 경쟁력을 회복하는 데도 많은 기여를 하며 농림축산식품과학기술대상 국무총리상(2013)과 국가연구개발 우수성과 100선(2014)에 연거푸 선정되며 그 진가를 인정받은 바 있습니다. 그리고 2014년부터는 골든 씨드 프로젝트(GSP)에 참여하여 지속적으로 병리검정 체계를 확립한 결과 현재 45종 식물병에 대한 저항성을 검정할 수 있는 국내 유일 기관으로 발전하였습니다.